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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짐한 막걸리 밥상에 콩나물국밥 해장…줄잇는 주당들

16,560 2018.03.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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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짐한 막걸리 밥상에 콩나물국밥 해장…줄잇는 주당들

 


 그 시절 식당일이란 점잖고 살 만한 전주인에겐 구차한 것이었다. 전주는 나름 집집마다 먹을 게 많았다. 집이 곧 식당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갈수록 전주의 곳간이 비어갔다. 광주일고와 함께 전라도 최고 명문고였던 전주고 인재가 서울로 가버린다. 향토를 지킬 인재가 부재했다. 큰 공장도 전무했다. 20여 년 전 현대쌍용자동차, 10여 년 전 들어왔다가 철수한 현대중공업 등이 고작이었다. 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전주는 ‘쇠락의 고장’으로 흘러간다. 먹고살기 위해 식당을 여는 이들이 늘어난다. ‘가족회관’이 문을 열 무렵, 그 언저리는 전주에서 가장 핫한 곳이었다. 전라도 1호 미원광고탑이 서 있는 식당 앞 네거리는 ‘미원탑사거리’로 불렸다. 김년임 명인은 한때 시내에서 음악다방을 경영했다. 근처 건달까지 자식처럼 밥을 챙겨주었다. 잘 퍼주는 여인으로 소문났다. 그게 성공의 동력. ‘가족 같은 식당’이란 의미로 가족회관을 열었다.

1964년쯤 ‘성심당’이 죽집으로 출발해 일가를 이룬다. 동시에 중앙회관, 한국관, 한국집, 갑기관, 종로회관 등이 근처에 모여든다. 이들이 비빔밥 1세대 식당들이다. 뒤에 고궁, 풍남관 등이 가세를 한다. ‘고궁’은 막내였지만 비빔밥시식퍼포먼스 등을 통해 전국적 인지도를 확보한다.

전주비빔밥과 한정식에 새로운 대립각을 들이민 식당이 있는데 바로 9년 전 전주 첫 약선한정식당으로 출발한 덕진구 금암동 ‘감로헌’이다. 조현주 사장은 정진영 전주대 대체건강관리학부 객원교수와 함께 조선 황실과 공유되는 전주식 힐링밥상을 꿈꾸고 있다.

전주발 유흥문화와 콩나물 국밥
중앙동·짱골목일대 펄펄끓인 삼백집
미지근한 토렴식 국밥 왱이집 등 성업
문재인 대통령도 찾아와 식사 유명세

술과 밥 한방에 해결 막걸리촌
10만원대 한정식보다 알차다는 평가
서신동 옛촌 족발·삼계탕·훈제오리
삼천동 용진집 해물안주도 인기몰이

가맥문화 일으킨 전일슈퍼
슈퍼안 맥주 먹는 테이블…낮술파 몰려
연탄불에 구운 대관령 황태 안주 대박
중앙시장 진미집 포차야식으로 이어져

◆전주십미와 비빔밥

전주음식 첫걸음은 ‘전주십미(全州十味)’ 익히기부터. 전주십미는 전주 대표 10가지 식재료. 사정골의 ‘파라시’(팔월에 딴 감), 기린봉의 ‘열무’, 자만동과 오목대의 ‘녹두묵’, 소양리의 ‘담배’, 신풍리의 ‘애호박’, 전주천의 ‘모래무지’, 한내의 ‘참게’, 삼례의 ‘무’, 서정리의 ‘콩나물’, 화산동의 ‘미나리’를 일컫는다. 전주비빔밥보다 더 오래된 비빔밥이 전국에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게 울산의 ‘함양집’, 진주의 ‘천황식당’ ‘제일식당’ 등이다.

전주비빔밥의 정식 명칭은 ‘전주콩나물육회비빔밥’. 두 스타일이 있다. 성심당처럼 콩나물밥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고명을 올리거나 가족회관처럼 콩나물 섞지 않고 그냥 밥만 지어 그 위에 각종 재료를 올리는 식이다. 다른 비빔밥과 달리 전주는 밥에 무척 공을 들인다.

1990년대 비빔밥 표준레시피 작성을 위해 시내 비빔밥집 주인들이 모였다. 서로의 레시피를 공유했다. ‘전주비빔밥에는 주재료로 콩나물 황포묵 육회 무채 고사리 도라지 애호박 표고버섯, 고명으로는 잣 밤 대추 은행 호두 오이 당근 계란지단 등만 사용하자’고 합의한다.

문제는 날계란. 가족회관의 경우 ‘계란의 비린내가 부담스럽다’고 하는 관광객 때문에 이젠 식감을 위해 계란은 올리지 않는다. 손수 만든 아롱사태김장아찌, 콩나물잡채 등 12종의 곁반찬 못지않게 고봉밥 같은 계란찜도 이 집 음식내공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족회관의 가업은 딸 양미씨한테로 이어졌다.

전주는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됐다. 전주대에 ‘국제한식조리학교’도 있다. 그런 흐름을 타고 비빔밥 세계화를 도모한다. 먹방시대를 겨냥해 ‘전주비빔빵’으로 변신한다. ‘테이크아웃 비빔밥’을 개발한 ‘비빔밥세계화추진단’은 한옥촌에 비빔밥크로켓, 비빔밥도너츠, 비빔밥만두 등을 등장시켰다.

◆콩나물국밥 이야기

주당들은 ‘콩나물국밥 없이 술문화도 없다’고 한다. 술과 국밥이 한 세트로 움직인다. 그래서 한 끼 식사로 먹으면 별 맛이 없다. 콩나물국밥은 남부시장, 중앙시장, 모래내시장 등을 끼고 서민들과 지금까지 ‘밀당’하고 있다. 전주에서 콩나물국밥으로 가장 유명해진 데는 ‘삼백집’, ‘왱이집’, 남부시장 내 ‘현대옥’ 정도. 그 흐름을 이어받은 게 남부시장의 ‘조점례 남문 피순대국’이다.

콩나물은 원래 전북 임실에서 자란 ‘쥐눈이콩(鼠目台)’이 기본이었다. 그 콩을 교동(옛 자만동)의 녹두포샘물과 상정골의 노내기샘물로 길러낸다. 하지만 수질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2006년 전주의 19개 콩나물 공장이 영농조합을 결성했다. 이틀에 한 번 통 속의 콩나물을 물속에 푹 담갔다가 교반해서 길러낸다.

1929년 12월1일에 발간된 종합잡지 ‘별건곤’에 전주콩나물국밥이 ‘탁백이국’으로 소개된다. 장은 금물이고 반드시 소금으로 맛을 낸다. 콩나물국밥은 두 종류. 다가동·중앙동·짱골목 일대에서 성업한 펄펄 끓인 ‘삼백집’ 스타일의 콩나물국밥, 남문밖장과 동문거리 ‘왱이집’의 토렴식 콩나물국밥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뜨거운 것, 후자는 미지근한 버전. 이 콩나물국밥은 전주발 유흥문화와 맞물려 돌아간다.

광복 직후 전주 대표적 유흥가는 속칭 ‘짱골목’ 일대였다. 대구역전 홍등가와 비견된다. 짱골목은 영화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짱’은 극장의 ‘장(場)’을 지칭한다. 전주극장은 1925년 9월에 제국관(帝國館)으로 문을 연 전주 최초의 근대적 극장.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중앙동 일대 나이트클럽 때문에 휘청거린다. 1980년대는 ‘콩나물불고기집’들이 짱골목에서 반짝했다.

삼백집이 허가받은 것은 1967년. 실제는 1947년에 욕쟁이였던 고(故) 이봉순 할매가 개업했다. ‘하루 딱 300그릇만 팔겠다’고 해서 삼백집. 5·16거사를 성공한 뒤 몰래 해장하러 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감어린 욕설을 퍼부어 더 알려진다. 1982년 고(故) 방복순씨, 1987년 조정래·김분임 부부가 승계한다.

1986년 문을 연 왱이집은 후발주자지만 특유의 친절함과 배려로 자릴 잡았다. 구석방에 2015년 겨울에 여길 찾은 문재인 대통령을 기념하는 봉황문양 커버가 씌워진 의자가 있다. 유대성 사장은 제주도 출신. 그녀는 남문시장 내 토렴식 국밥의 지존인 현대옥 방식을 벤치마킹해 대박쳤다. 세상에서 가장 뜨겁지 않은 국밥을 낸다. 국물을 먹기 전에 수란을 생김과 함께 먹도록 하는 게 인상적이다.

◆ 전주발 막걸리찬가

전주에 와서 새롭게 발견한 게 있다. 신도심권인 삼천동과 서신동 양옥주택가를 축으로 형성된 전주식 ‘막걸리밥상’이다. 이 밥상은 통영의 ‘다찌’, 마산의 ‘통술’, 진주의 ‘실비’처럼 배가 터져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푸짐하게 안주를 내놓는다. 백번집, 수구정, 행원, 만성회관, 무궁화, 전라도음식이야기, 수랏간 등 한상에 10만원이 넘는 전주한정식 메뉴라인보다 더 알차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전주한정식의 맥은 수구정에서 ‘백번집’으로 축이 이동했다. 조선왕조 궁중요리 인간문화재인 황혜성의 셋째딸 한복진이 전주대에서 한식을 가르칠 때 궁중한정식당 ‘궁’ 오픈에 간여했는데 그다지 전주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주백반은 ‘죽림식당’과 ‘전라감영’ 등이 옛 정취를 겨우 갖고 있다.

관광객들은 자꾸 술과 밥을 한방에 해결해주는 막걸리촌으로 쏠린다. 막걸리촌의 첫장은 1997년에 열린다. 삼천동 ‘수목 막걸리’가 효시다. 물론 그 이전은 ‘정든집’ 등 원도심을 파고든 추억의 주막들이 주름잡다가 외곽으로 흩어진 것. 전남 화순 출신의 여성 정선희씨가 1994년께 삼천동 골목에 주막을 열고 처음엔 약주·청주 등을 팔았다. ‘값싸고 안주 끝내주는 집’으로 금세 소문 났다. ‘똥꾼(술꾼)’이 밀려왔다. 요즘은 삼천동 ‘용진집’이 인기몰이 중이다.

삼천동 골목은 시의원과 언론인이 머릴 맞대고 만든 ‘기획상품’. 삼천동에 이어 서신동도 막걸리골목이 된다. 그곳의 유명 맛집은 ‘옛촌막걸리’. 조금 늦게 가면 별관으로 밀려난다. 벽은 온통 낙서판. 문재인 대통령도 찾았다. 여긴 계산법이 좀 독특하다. 기본상과 세트상 두 종류가 있다. 기본상은 한 주전자를 추가할 때 1만7천원(한 가지 안주 포함)이 추가된다. 세트상은 좀 더 푸짐해 한주전자 값으로 7천원만 내면 된다. 용진집은 해물, 옛촌막걸리는 족발·삼계탕·훈제오리·돼지묵은지찜 등 고기류에 치중한다.

◆전주발 가맥문화

막걸리 시대가 하이트맥주를 앞세워 ‘맥주시대’로 접어들 때 무시무시한 슈퍼 하나가 전주 술판을 확 뒤집어 놓는다. 바로 경원동의 ‘전일슈퍼’. 전주에서 ‘가맥(슈퍼마켓에서 파는 가게맥주) 문화’를 꽃피운 가히 기념비적인 술집이다. 슈퍼 안에 들어가면 테이블이 30여 개. 일반 슈퍼용 물건은 겨우 모양새만 갖추고 있다. 말만 슈퍼지 내부는 널찍한 레스호프. 전일슈퍼 때문에 덩달아 가맥이란 메뉴판이 시내 곳곳을 파고든다.

원래 근처 ‘경원슈퍼’가 공무원·회사원 등에게 낮맥주를 많이 팔았다. 이때 대표 안주가 노가리를 능가하는 황태. 그걸 본 전일슈퍼가 벤치마킹한다. 대관령 최고급 황태를 연탄불에 구워 최상의 육질을 확보했다. 거기에 마구 두들긴 갑오징어와 계란말이를 더 얹어냈다. 대박이 난다. 성공의 비밀은 청양고추가 들어간 간장소스.

전일슈퍼는 결국 전라도를 대표하는 하이트맥주의 최대 공급처 중 하나로 급부상한다. 처음은 연탄집으로 출발한 전일슈퍼. 현재 이순덕 여사장이 남편을 대신해 가게를 지킨다.

가맥은 ‘야식(夜食·전주식 실내포차)’을 부른다. 중앙시장 하천변에 자리 잡은 ‘진미집’과 ‘오원집’이 전주야식을 책임진다. 1984년 문을 연 진미집은 홀 중앙에 고기 굽는 존이 있다. 이게 침샘을 자극한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연탄불로 구워낸 뒤 손님상에 낸다. 파일럿처럼 집게를 멋들어지게 조정하는 주인. 그것 때문에 술이 더 팔린다. 대구북성로돼지불고기를 닮았다.

가맥은 일하면서도 먹을 수 있는 일종의 ‘낮술’이다. 낮술파가 맘이 동하면 퇴근 후 본격적으로 술과 밥을 겸해 거나하게 취할 수 있는 데가 막걸리촌이다. 주당은 3차까지 고집한다. 야식은 그 욕구를 존중한다. 쓰린 속은 다시 콩나물국밥이 지켜준다. 국밥과 국밥 사이에 전주의 각종 술이 빨래처럼 널려 있다.

전주의 대표적 문화사랑방은 객사카페로 불리는 ‘새벽강’이다. 한때는 동문네거리를 예술판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문화패들이 밀어줬다. 40여 개의 각종 종파가 운집했던 호남의 영산, 그 모악산에 낭인처럼 깃들었다가 지금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지리산 언저리에 닻을 내린 떠돌이 박남준 시인이 그 근처에 차렸던 카페 ‘다문(茶門)’도 한 전통을 쌓고 있다. 다문은 1998년 한옥촌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전통주 행사·놀이패 공연 등을 열며 한옥촌의 문화리더로 성장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가면서 다문은 ‘소비촌’으로 변한 한옥촌의 관광객한테 감금돼 버린다. 3년간 휴업을 하기도 했다. 2년 전 소춘수씨가 게스트하우스를 겸한 찻집이자 밥집인 다문의 경영자로 나선다. 그의 친구 박시도 시인. 섬진강 상류에서 야생차를 만들어 다문에 공급하고 있다. 저렇게 질박한 틈새의 먹거리들. 그게 화려한 비빔밥과 한정식보다 더 전주스럽게 보였다.

조금은 음습하지만 괴목의 옹이처럼 다부진, 그런 다문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프리카 누떼 같은 한복족들이 내 그림자를 파묻어버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화 없는 소비는 결국 독’이라는 것. 그렇다면. 다문, 어쩜 한옥촌이 ‘문화백화(文化白化)’ 되는 걸 막는 최후의 ‘문화백신’이 아닐까?’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